내포에 찾아온 개화의 물결, 2024 예산 문화유산 야행
충청남도 기념물
예산성당禮山聖堂
예산성당은 전형적인 삼량식 성당 건축으로,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이다.
충청남도 기념물
예산호서은행본점禮山湖西銀行本店
예산호서은행본점은 민족 금융기관이었으며, 현재는 예산 새마을금고로 사용되고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禮山李成萬兄弟孝悌碑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고려 전기의 사람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행과 형제의 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김정희 선생 유물 <혼서지.생원시권.농상지실>金正喜先生遺物 <婚書紙.生員試卷.農祥之室>
김정희 선생 유물은 조선시대 학자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것으로, 「혼서지」 「생원시권」 「농상지실」 의 3점이다.
국가민속문화유산
보부상 유품(2)褓負商 遺品
보부상 유품은 충청남도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덕상무사’의 유품이다.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 (1972)尹奉吉義士 遺品
윤봉길의사 유품은 상해 홍구 공원으로 떠나는 날 아침 김구 선생과 바꾸어 찬 낡은 회중시계를 포함해 1972년 기준 총 13건이 있다.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 (1976)尹奉吉義士 遺品
1976년 기준 윤봉길의사 유품은 월진회 통장을 포함해 총 18건이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예산성당禮山聖堂
예산성당은 외관의 전체구성이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 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로서 1933년에 착공하여 1934년에 준공하였다.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으며, 일본의 건축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서양의 건축문화를 직접 수용하여 토착화한 건축양식으로서 근대건축사 연구의 중요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충청남도 기념물
예산호서은행본점禮山湖西銀行本店
예산호서은행본점은 민족 금융기관이었으며, 현재는 예산새마을금고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충청남도 서북지역의 교통 및 상업 중심지에 자리한 호서은행은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후 더욱 더 심해진 일본의 금융압박 속에서도 민간자본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3년 지역 민간 지주들의 자본금 30만 원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작은 규모이면서도 당당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예산군청 홈페이지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禮山李成萬兄弟孝悌碑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고려 전기의 사람인 이성만·이순 형제의 효행과 형제의 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형은 아버지 묘를 지키고 동생은 어머니 묘를 3년 동안 곁에서 지키며 돌보았다. 아침은 형 집에서 저녁은 아우 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같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조정은 이 사실을 표창하여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김정희 선생 유물 <혼서지, 생원시권, 농상지실>金正喜先生遺物 <婚書紙.生員試卷.農祥之室>
김정희 선생 유물은 조선시대 학자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것으로, 「혼서지」, 「생원시권」, 「농상지실」 의 3점이다. 추사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농상지실」은 김정희 나이 28세 문과에 급제할 무렵 게시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혼서지」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62세 때에 써서 보낸 것이다. 「생원시권」은 그의 나이 24세 때 실시한 한림소시에 응시했던 답안지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민속문화유산
보부상 유품(2)褓負商 遺品
보부상 유품은 충청남도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덕상무사’의 유품으로, 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 16점 등이 있다. 이 유품들은 예덕상무사 보부상의 조직과 기능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2)尹奉吉義士 遺品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으며,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 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24살의 나이로 떠났다. 윤봉길의사 유품은 상해 홍구 공원으로 떠나는 날 아침 김구 선생과 바꾸어 찬 낡은 회중시계를 포함해 1972년 기준 총 13건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6)尹奉吉義士 遺品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으며,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 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24살의 나이로 떠났다. 1976년 기준 윤봉길의사 유품은 월진회 통장을 포함해 총 18건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